새만금 33센터


새만금지구(내부개발) : 새만금 방조제(33.9km) 내측에 농업용지구간 방수제(62.1km)를 축조하고, 

농생명용지(9,430ha), 잼버리 부지 매립(884ha), 환경생태용지(929ha), 방조제 등 기타용지(935ha)등 12,178ha 조성

※ 새만금 방조제(33.9㎞)를 2010년 완공에 이어 내부개발 추진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들어낸 33.9km의 새만금 방조제 완공에 이어, 새만금 농생명용지를 첨단농산업, 

친환경농업 및 농업생태관광 등 다양한 목적으로 개발. 활용할 계획


망해사 | 望海寺


창건시기642년 (백제 의자왕2년)
창건자부설거사
소재지전북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004
사격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 말사

망해사는 김제에서 서북방 약27km 지점에 있으며 심포 어항에 이르기 1km 전방에서 오른쪽 언덕바지 진봉산 능선따라 올라가 고개넘어 왼쪽으로 즉 큰길에서 약500m지점 정도를 내려가면 깎은듯이 세워진 기암괴석 벼랑위에 망망대해 황해의 파도가 출렁이고 고군산열도가 내다 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어 이름 그대로 망해사입니다.


전하는 바로는 이곳은 본시 섬이었다 하여 642년(백제 의자왕 2년)에 부설거사가 까닭이 있어 이곳에 사찰을 개창하여 수도하다가 입적하신 곳이라 하며 그 후 754년(경덕왕 13년)에 당나라의 중 중도법사(일명 통장화상)가 중창하였으나 조선조에 들어 많은 수난을 당하였습니다.


그 뒤 인조대왕 때 만경 불거촌출신인 고명한 화상인 진묵대사가 재건복구하여 크게 번창하였는데 그 때가 망해사로서는 최강전성기였으며, 그 후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망해사 경내에는 보광명전 낙서전 칠성각 요사 그리고 4개의 부도가 있습니다.


진봉면의 황금들녘


'하늘과 땅이 만나는 오직 한 곳', 김제의 끝없는 황금들녘은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광활한 지평선으로 이어져 있어 진봉면 어느 곳을 가더라도 지평선을 감상 할 수 있으며, 

북쪽으로 만경강과 남쪽으로 동진강 사이에서 펼쳐지는 망망한 진봉 들녘은 

고품질 특미인 지평선쌀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두곡서원


서원명두곡서원
위치진봉면 심포리 명동마을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965
위패내용포은 정몽주, 봉호당문헌공 강원기공
시대조선/조선후기

두곡서원(杜谷書院)은 성리학자 강원기(康元紀)[1423~1498]의 거처가 있던 곳으로, 배향되어 있는 사람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봉호당 문헌공 강원기, 난계 성전림(成傳霖) 등이다. 성리학자 강원기는 야은(冶隱) 길재(吉再), 정몽주와 더불어 경전을 읽어 유풍(儒風)을 크게 진작시켰다. 그가 경원과 은성 두 고을의 수령으로 있을 때 충성과 효도의 길을 가르쳐 주는 『이존록』이라는 책을 만들어 집집마다 나누어 주기도 했다.

태조 때 좌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그 후 간청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만경현(지금의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정착해서 이곳의 세 가지 폐단을 고쳐주어 주민들의 고충을 풀게 되었다. 그 뒤 지방 사람들은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두곡서원을 세우고 배향하였다. 그는 후세에 『봉호집(鳳湖集)』이라는 유집을 남겼다.


두곡서원은 1589년(선조 22)에 창건되었다. 그 후 1869년(고종 6)에 철폐되었던 것을 1970년에 다시 지었다.


두곡서원 강당은 전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숭의문이라 쓰여 있는 내삼문 뒤로에 위치한 사당인 영모재(永慕齋)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성리학자 강원기 | 康元紀


분야역사/전통 시대,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인물/문무 관인
지역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시대조선/조선 전기

강원기는 신천강씨로 고려시대에 삼중대광 도첨의 우정승을 지낸 숙재의 증손이요, 대광보국 승록대부 상산백인 서의 손자이며, 찬성사인 아버지 윤의 아들로 황해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 경술에 능하고 학력이 깊었으며, 작고 적은 일에는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행동에 규범이 있고, 친구를 깨끗이 대하며 명예와 이익을 멀리하였습니다. 그는 야은 길재, 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경전을 읽어 그 뜻을 밝히며 갈고 닦는 한편 거의 끊겨가는 학문을 일으켜 세워 우리나라의 유풍을 크게 진작시켰습니다.

그는 덕과 인을 쌓을 때는 반드시 조상과 연계하여 술회되는 도리를 생각하고 충신의 언행을 할 때에는 정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선조의 유훈을 계승하고 진실해야 한다고 자제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는 두릉(만경의 옛이름)에 현인들이 청수염결하라는 글귀가 있음에 그 뜻을 따라서 이 곳에 왔습니다. 와서보니 구름에 밭을 갈고, 밝은 달 아래 낚시질하는 좋은 곳이라 벼슬을 그만두고 늘그막을 보낼 때 이곳에 집을 짓고 봉호처사(鳳湖處士)라는 현판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호수의 남쪽과 두곡의 서쪽에는 별도로 영락와(永樂窩)라는 집을 지어 예기와 주역을 강의하였습니다.

강원기는 벼슬을 그만두고 옛 만경현(진봉면 심포리)에 정착하였는데 고려 때부터 삼폐라하여 백성들이 큰 곤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첫째 봉수대의 문제요, 둘째는 공무라 하여 매년 300필의 말을 길러 나라에 바치는 문제요, 셋째는 공려라 하여 매년 6,000편의 숫돌을 만들어 나라에 바쳐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 세가지가 모두 진봉면 심포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 곳 주민들은 연중 쉴새없이 노역과 재정의 부담을 안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고충을 조선초 태조말엽에 그의 제자 이지로가 전라도 도백으로 부임하자 세가지 실정을 낱낱이 고해 어려움을 덜게 되었는데, 강원기가 심포리 심포마을에 들어오면서 이루어 지게되었습니다.

그 결과, 말 기르는 것은 제주도로, 봉수대는 계화도로, 숫돌은 태인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그 뒤 지방사람들은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두곡서원을 세우고 배향하였습니다. 황해도에서 태어나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서 세상을 떠난 강원기는 "봉호집"이라는 유집을 남겼습니다.


3대 부통령 함태영


분야역사/근현대,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정당리
시대근대/근대, 현대/현대

3대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은 한말의 명법관이요, 3.1운동을 막후에서 주도한 인물입니다. 

기독교 교직자로서 평생 우리나라 기독교 발전에 헌신해 왔습니다.


송암 함태영은 풍운의 한말, 대내외적으로 어수선한 1873년 김제시 진봉면 정당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일대에는 강릉함씨 일족이 3백여년 전부터 자리를 잡고 터를 일구어 왔습니다. 함씨일가는 남의 논밭을 얻어 경작하는 처지여서 그렇게 윤택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재주가 있어 부친 함우택은 남의 집에 서당을 차려놓고 훈장을 하였고 작명 관상 풍수에도 능하였다고 합니다.


김제 만경일대에서는 함학자나 함풍수 함지사라 불렀고 50여살에 전라좌수영 도시무과에 합격한 후에는 함의관이라고 불렀습니다. 함태영은 1889년 16살 때 부친이 벼슬길에 올라 서울로 떠날 때 같이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친은 나중에 통정의관과 함께 한성부원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는 문호개방과 동학혁명 등 갈수록 갈피를 못잡아 가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도 사숙을 전전하면서 면학에 힘을 기울여 신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895년에 함태영은 한국최초의 근대식 사법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였습니다. 이 법관 양성소는 대한제국 조정에 의해 세워진 법관양성 전문기관으로 서양의 사법제도를 이 땅에 첫 도입한 것입니다. 그는 6개월 과정의 이 양성소를 수석으로 수료하고 22살에 법관이 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 때 같이 입학한 사람중에는 이준열사가 있었습니다.

이듬해 함태영은 3월 한성지방재판소 검사시보로 임명돼 처음으로 법관생활을 하게되었습니다. 이로부터 1910년까지 경기재판소 판사, 한성부재판소 검사,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검사, 법부 법률기초위원, 대심원판사 등 다채로운 경력을 쌓게 됩니다. 그러나 불의를 응징하는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몇차례 면직의 고비를 겪어야 했습니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으로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1921년 평양신학교입학 1923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 1933년 조선기독교 연합공의 회장을, 1949년 제2대 심계원장으로 등용, 그 뒤 1950년 한국신학대학장을 역임했습니다. 1952년 국회에서 개정 헌법을 공포하고 선거를 실시 제2대 대통령에 이승만이 당선되었고, 제 3대부통령에 함태영이 당선되었습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 건국공로 훈장 단장을 수여하였습니다. 그리고, 1964년 10월 24일 94세로 파란과 영예의 한평생을 마치고 영면하였으며 정부에서는 국민장으로 예우하였습니다.


독립투사 곽경렬


분야역사/근현대,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시대근대/근대

독립투사 곽경렬은 1901년 김제시 진봉면 남상에서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15년 15세의 어린 나이로 박상진을 총사령관으로 결성된 대한광복회 회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이는 대한광복회복단의 인사들을 통합하여 대구에서 조직한 혁명단체로서 전국적인 조직과 더불어 만주의 독립군 기지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1910년대 최대의 국내항일조직이었습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혁명기지를 확보한 후 적시에 폭동으로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자금 수합이 친일부호들의 외면으로 예정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이로 인하여 혁명계획이 난관에 봉착하게 되자, 대한광복회는 국민적 각성과 함께 식민성 지주들에 대한 응징으로 친일 부호를 처단하는 활동을 펴나갔습니다.

그리하여 경북, 전남, 충남의 세 지역에서 악성부호들을 처단했는데 이 때 그는 한훈, 유장렬 등과 함께 양재학, 서도현 등 전남지역의 친일 부호 처단 활동에 참가하였으며 일본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그 일경과 주구배 숙청에 고, 멀리 금강산에 들어가 김동평과 운용중 등 부일분자를 사살하였습니다.

그 후 몸을 피하여 일시 만주로 망명하였던 것인데 그 때 권총 1정을 휴대한 채 향리로 돌아왔습니다. 1919년 3월 민족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으므로 일시 거사를 중지하고 있다가 동년 12월 11일 전북 옥구군 대야면 소산리 김영순의 집으로 들어가 상해임시정부로 보낸 군자금으로 당시 화폐 27월을 받아 연락원에게 전송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1924년 체포당하여 2년여의 모진 고문 끝에 1926년 전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의 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1929년 4월 1일 전주감옥에서 출옥한 후로는 일제의 고문에 못이겨 29세의 나이에 반병신이 되어 재향영농에 치중하다 김제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다가 1968년 6월 향년 68세로 별세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82년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습니다.


유인 이천서씨 효열비


위치진봉면 가실리 정동 안 정미소 뒷길가
구조4기둥 석비각(돌담)
규모비 125, 42, 17
연혁

정묘(1927) 小春(10월)


효자 최시환 효녀 최씨정문


위치진봉면 가실리 정동 동쪽 산너머
구조정려비각, 팔각지붕 홑처마
규모각 200, 184
연혁

숭정 기운후 117년, 영조20년 갑자(1744년) 11월


효행려 ▶ 효자 홍위안 정문


위치진봉면 가실리 정동 안 정미소 뒷길가
구조4기둥 석비각(돌담)
규모비 125, 42, 17
연혁

정묘(1927) 小春(10월)


효자 박풍진, 박노현 정문


위치진봉면 고사리 석치 도로변
구조석비각(돌난간)
규모비 120, 42, 18
연혁

단군 기원 4268년 을해 11월


열녀문 ▶ 열녀 해주오씨 정문


위치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 791-1[고사5길 9]

진봉면사무소에서 진봉지서를 지나 심포리로 가는 길을 따라 약 2.5㎞쯤 가면 오른쪽에 인양마을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인양마을로 가는 길로 접어들어 약 100m 가면 마을 왼쪽 산자락에 열녀 해주오씨 정려가 있다.

구조석비각
규모비 105, 39, 16
연혁정축(1937년) 9월절

이희섭의 처 해주오씨(海州吳氏)는 시부모 병환에 정성을 다하고, 남편 이희섭이 병들어 눕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병간호를 다하였다. 남편이 건강해야 집안이 지탱할 수 있고 자식의 교육도 바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본인의 몸보다 남편을 위해 헌신한 것이 여러 유림들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본다. 아들 이기호도 효성이 지극하여 문중에서 정문(旌門)을 세웠다.


열녀 해주오씨 정려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졌다. 정려각에는 고갑자(古甲子)인 강어적분약(疆圉赤奮若)[1937년] 9월에 가선대부장례원경원임규장각부제학 연안 이병관(李炳觀)이 글을 지은 것이 있고, 글씨는 1958년 10월 족손 이순택(李淳宅)이 썼다.


열녀 해주오씨 정려는 팔작기와지붕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돌기둥과 돌기둥 사이에는 공간이 뚝 터져 있다. 정려각 안에는 월석으로 된 열녀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석 정면에 ‘열녀유인해주오씨지려(烈女孺人海州吳氏之閭)’라 새겨져 있다.


창효문 ▶ 효자 유공, 효부 전주최씨 사적비


위치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 238-2

구조4기둥 석비각
규모비 136, 47, 22
연혁단기 4304년 신해 復月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 종야마을에 있는 효자 유광근 사적비와 효부 전주최씨의 정려 모습이다. 비문에는 ‘효자송파거사유공광근사적비(孝子松坡居士柳公曠根事蹟碑) 효부유인전주최씨(孝婦孺人全州崔氏)’ 라고 각석되어 있다.


효자 강덕순비


위치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133-1

구조석비각
규모비 104, 36, 15
연혁歲 在 己 0 (1909) 5월 입하절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효자 강덕순의 정려각 모습이다. 석정려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1909년(순종 3) 5월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1993년 보수하면서 세운 와비로 된 개수비가 있다. 정려는 4기의 돌기둥 위에 팔작지붕 형태의 개석을 올렸고, 그 안에 좌대와 갓석이 있는 작은 비석이 있다. 비문에는 ‘효자신천강공덕순지비’라고 쓰여 있다. 효자비는 완산 이재현(李載現)이 글을 짓고, 달성 서재덕(徐載德)이 글씨를 썼다.


2021 지평선 추억의 보리밭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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